장재형(장다윗)목사를 오늘의 언어로 이해하려면 먼저 고린도후서의 박동을 듣게 된다. 바울은 교회의 상처와 혼란, 거짓 교사들의 비방, 자신의 사도권을 둘러싼 오해 속에서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운 목회자였다. 그는 아시아에서 당한 극심한 환난을 떠올리며 살 소망마저 끊어진 시간 속에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했다. 이 고백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신앙의 훈련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의 길이 바울의 길과 공명한다. 그의 사역은 성과의 장부가 아니라, 위로의 하나님을 배우며 한 걸음씩 순종해 온 목회자의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초창기부터 바울의 로마서가 보여 준 방식처럼 복음을 체계적으로 변증하고 교리를 견고히 세우는 일에 집중해 왔다. 신앙이 감정이나 경험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이 그의 가르침을 관통한다. 인간의 전적 부패,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복음주의의 핵심은 장재형목사가 세운 공동체와 교육 현장의 기초가 되었다.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에서 구현된 교육 철학은 신학과 실천, 학문과 선교, 변증과 영성의 균형을 지향한다. 이는 학위 취득을 넘어, 젊은 세대가 복음의 깊이를 이해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신학을 해석·변증·실천하도록 돕는 총체적 훈련이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을 재방문하며 교리를 바로 세우고 신앙을 점검했던 것처럼, 장재형목사의 교육과 목회는 공동체가 스스로 믿는 바를 설명하고 지켜낼 수 있도록 돕는 장기적 성육(聖育)의 전략이다.
고린도후서가 보여 준 바울의 리더십은 눈물과 편지, 권면과 자기 비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약함을 숨기지 않고,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했다.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에서 나왔고, 교회를 움직인 힘은 이미지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었다. 장재형목사의 리더십도 이와 닮아 있다. 그는 수직적 통제보다 수평적 동역을 중시하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는 언어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높낮이를 허무는 신학적 고백임을 강조한다. 동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려는 태도는 그의 사역 전반에 배어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이방 교회들의 연보를 독려하며 하나 됨을 세웠듯, 장재형목사는 복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다양한 배경의 사역이 연대할 때 선교가 더 깊고 넓게 뿌리내린다고 믿는다.
선교를 바라보는 눈에서도 두 사역자의 공명은 선명하다. 바울이 로마 제국의 언어와 도로망을 활용했다면, 장재형목사는 미디어·IT·예술·교육이라는 현대의 공용어를 선교의 통로로 삼았다. 그는 기독교 매체와 다양한 문화·교육 플랫폼을 통해 세상을 복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청년들이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독려했다. 이는 단지 기독교 소식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문화의 장(場)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정직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는 변증의 시도였다. 선교는 교회당의 특별 활동이 아니라 일상과 직업, 학문과 예술, 기술과 공공선의 영역 속으로 스며드는 삶의 양식임을 보여 준 실험이기도 했다. 바울이 도시마다 동역자를 세우며 교회 개척의 씨앗을 심은 것처럼, 장재형목사는 대륙과 세대를 넘어 리더를 세우고 공동체를 일으키며 복음주의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장기적 관점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길은 언제나 환난과 오해를 동반한다. 바울이 거짓 교사들의 비방과 성도들의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해야 했던 것처럼, 바울이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의 편지’를 보냈다고 고백했듯, 목회자의 언어는 늘 상처 입은 심령을 향한다. 그 말은 상처를 벌리는 칼이 아니라, 잘못 아문 통념을 절개해 새살이 돋게 하는 치유의 도구여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치유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약함과 실패마저 하나님께서 위로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확인해 왔다.
고린도후서의 반복되는 주제는 위로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개인적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동일한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통찰은 목회를 지탱하는 강력한 동력이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와 글, 그리고 현장의 지도력은 바로 이 위로의 신학에서 힘을 얻는다. 그는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과 오해, 실패와 낙심을 외면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이 은혜의 학교가 되어 우리를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훈련하며, 받은 위로를 흘려보내는 통로로 세운다는 복음의 약속을 붙든다.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한 ‘존재의 용기’는 이 맥락에서 단순한 심리적 결기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현실성에 뿌리내린 영적 담대함이다. 십자가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드러내는 동시에, 약함 속에 머무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사람을 새롭게 하는지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능력이 교회의 가장 낮은 자리, 보이지 않는 섬김과 인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충성에서 가장 선명히 빛난다고 강조한다.
교리를 세우는 일은 곧 삶을 세우는 일이다. 로마서와 고린도후서, 에베소서에 스며 있는 복음의 논리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윤리와 선교의 전략을 형성하는 실천적 원칙이다. 장재형목사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연방 대표성, 은혜의 질서, 에베소서 1장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는 비전이 교회의 교육·선교·자비·정의를 하나로 묶는 신학적 척추라고 보아 왔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신학을 방어하는 차원을 넘어, 문화와 학문, 경제와 기술의 영역에서 창조적 공헌을 통해 선교의 지평을 넓혀 가도록 격려한다. 신학은 신학교 강의실이나 강단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터와 거리, 미디어와 예술의 한복판에서 공공선을 위해 봉사할 때, 교리는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의미의 ‘살아 있는 교리’를 추구한다.
리더십의 윤리도 중요하다. 그는 명령과 통제보다 경청과 동행, 권한 위임과 세움을 가치 있게 여긴다. 바울이 디도와 디모데 같은 동역자들을 신뢰하고, 때론 권면하고 때론 위임하며 교회를 세워 갔듯, 장재형목사의 사역에는 사람을 키우는 기쁨이 중심에 있다. 교회 개척과 선교의 지속 가능성은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다.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복음으로 빚어진 인격이 또 다른 인격을 세우는 느리고도 확실한 방식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는 실수와 배움, 갈등과 화해를 지나며 성숙한다. 그래서 목회란 완성된 모델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좇아 매 순간 최선의 순종을 선택하는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그 여정 속에서 멈추어 성찰하고, 확신이 주어질 때 과감히 나아가며, 필요하면 돌아가는 담대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는 장재형목사가 각 현장에서 보여 준 실천적 지혜의 공통분모다.
선교적 상상력은 늘 현실의 한계를 넘어선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제도와 정책의 제약, 세속화와 상대주의의 도전은 오늘의 교회가 마주한 현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황에 맞는 지혜로 전했듯, 장재형목사는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변화하는 언어로 전하는 법을 공동체가 배우도록 이끈다. 미디어와 IT, 예술과 교육의 접점에서 복음주의 신앙은 새로운 어휘를 얻고, 신자들은 일상의 자리에서 선교사로 선다. 이것이 곧 ‘흩어진 교회’의 비전이다. 주일에 모여 예배하던 교회가 월요일에는 삶터로 흩어져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공적 담론을 책임 있게 이끌며, 전문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정직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올리벳대학교와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은 이 비전을 구체화하는 훈련장이자 실험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場)들 안에서 장기적으로 사람을 세우고, 세대를 잇는 리더십을 일으키며, 지역과 문화의 울타리를 넘어 복음을 번역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결국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고백처럼, “과거에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시며 이후에도 건지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망이 장재형목사의 사역을 떠받친다. 그는 어려움과 오해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일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간다. 복음의 길은 넓지 않지만 확실하다. 약함 속에서 완전해지는 은혜를 배운 사람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바울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요청했듯, 오늘 우리는 장재형목사와 더불어,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수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들과 더불어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 이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이 여정의 핵심은 분명하다. 복음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위로하시고 건지신다. 교회는 연합할수록 강해지고, 교회 개척과 선교는 세대와 문화를 넘어 계속될 것이다. 이 길 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인내,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일어서는 용기, 그리고 서로를 위한 간구다. 그런 의미에서 장재형목사의 발걸음은 바울의 고백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들려준다. 그는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을 의지해 내일을 소망하며, 진리와 위로로 사람을 세우는 교회의 고전적 사명을 오늘의 시간 속에서 새롭게 이어 간다.
로마서 12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구원받은 존재로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구원의 심오한 비밀을 가르쳤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이 흐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 중심사(主流史)와 주변사(周邊史)가 있으며,중심사는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통해 역사가 이끌려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 이스라엘(New Israel)’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의 구원론과 역사론을 토대로, 곧 구원받은 후에 시작되는 새로운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바울이 말하는 새 이스라엘은 우리의 이야기로 적용될 수 있다. 구약에서 선택받은 옛 이스라엘(Old Israel)이 존재했고, 신약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한 새 이스라엘이 생겨났다. 바울은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새 이스라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하나님의 구원사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설명한다. 옛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불순종함으로 인해 깎여 나간 가지와도 같고, 이방인들이 그 빈자리에 접붙임 받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곧 교회의 기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새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로,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중심사를 형성하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곧 하나님이 선택해 구별해놓으신 자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며 세상에 섞여버렸고, 그 결과 노아의 심판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세상에 물들어 죄의 길로 간다면 그 심판이 임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에서 강조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짝하여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드러나고, 새 이스라엘이 일어설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이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종말론적 사명으로 연결해 설명한다.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종말론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는 단지 종말의 징조를 예언하고 두려워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도록 부르심받았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과 49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나타난 ‘두루마기를 빠는’ 이미지는 ‘행실을 깨끗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우리의 일상에서도 계속 그 옷을 깨끗이 빨아야 함을 뜻한다. 세상적인 죄의 습관을 버리고, 성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새 이스라엘의 표지다.
바울이 구원론(롬 1-8장), 역사론(롬 9-11장)을 설명하고 이어서 로마서 12장에서 ‘실천론’을 말하는 흐름은 매우 논리적이다. 구원을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자라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삶 전체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곧 예배이며, 이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형식적 예배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으로 확대된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예배와 설교에서 “삶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이 점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헌신을 뜻한다.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자기 것’을 우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우리는 먼저 남을 위해 희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 이스라엘이 걷는 길이며, 역사에서 중심사로서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강조한다. 이 세대란 곧 세상의 가치관과 풍조를 의미한다. 세상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과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이기심’이 지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 마음이 곧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역사를 읽는 눈’과 ‘종말론적 소명’을 함께 가지라고 거듭 강조한다. 우리가 단순히 개인 구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그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구원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택하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자기 자랑이나 특권의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택하심을 통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봉사하고 희생해야 함을 가리킨다.
특히 창세기에서 야곱의 이야기는 매우 시사적이다. 야곱이 에서와 어떻게 화해했는지를 보면, 그는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을 함으로써 형과 화목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나아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 나아가 사회와 민족 간의 갈등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은 ‘화해와 용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막힌 담을 허무는 정신’을 늘 강조하며, 십자가의 정신이 그 벽을 허무는 열쇠임을 가르친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했는데, 곧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가 구현된 곳이다. 교회는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로를 원수로 만들고 벽을 쌓는 세상 풍조에 맞서 ‘코이노니아(koinonia)’를 실현해야 한다.
‘코이노니아’는 그리스어로 ‘교제’ 혹은 ‘사귐’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무는 영적 교제를 뜻한다. 바울은 ‘캐리그마(kerygma)’, 즉 말씀의 선포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고, 이어서 이 말씀을 받은 자들이 함께 교제를 이루는 ‘코이노니아’를 강조했다. 우리가 구원론과 역사론을 깨달았다면, 그다음에는 교회 안에서 서로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참된 교제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제 속에서 형제적 사랑이 실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 곧 새 이스라엘의 증거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코이노니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졌다면, 그다음 단계인 ‘디아코니아(diakonia)’로 나아가야 한다. ‘디아코니아’는 ‘봉사’ 혹은 ‘섬김’을 의미한다. 로마서 12장 13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이것이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사랑한다면, 실제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 사도도 “네가 ‘평안히 가라, 따뜻하게 지내라, 배부르게 되라’고 말만 하고,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약 2:16)고 지적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마서 12장 1-13절은 우리의 ‘실천적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바울은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우리식 표현으로 풀어내며, 실제로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 많이 베풀라고 권면한다. 만약 선교지에서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만’ 주는 데 그치지 말고, 가능한 한 더 보내 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라”는 황금률(마 5:41)이며,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는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서, 서로의 쓸 것을 공급하고, 한 몸이 되어 세계 곳곳에 복음과 사랑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핵심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자라면, 이제 그 믿음을 ‘실천적인 삶’으로 증명하라는 것이다. 구원은 단순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세상 풍조와 반대되는 길을 가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희생의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곧 ‘영적 예배’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원리를 교회 안팎에서 강조하며,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섬김이 진정한 예배라고 역설한다. 교회는 여러 나라의 선교지를 세워나가고, 서로 도우며,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공급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뤄가야 한다. 영적 골조(뼈대)가 든든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힘줄과 살(실질적인 사랑과 봉사)이 함께 붙어야 교회 공동체가 큰 군대처럼 일어선다는 에스겔 37장의 비전도 우리의 실천을 촉구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 뼈대를 세워주셨다면, 이제는 그것에 힘줄과 살을 더해 생기 넘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곧 디아코니아 정신이며, 로마서 12장이 가르치는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이다.
이 모든 가르침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몸소 보여주신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다(요 21:15-17).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의 양을 먹이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선교지와 이웃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함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새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로마서 12장의 메시지와 장재형 목사의 실제적 가르침이 가리키는 핵심이다.
2. 성도의 디아코니아와 실천적 예배
새 이스라엘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디아코니아와 실천적 예배가 따라와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제시하는 구체적인 권면들은,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이, 구원의 교리(롬 1-8장)와 이스라엘·새 이스라엘의 역사론(롬 9-11장)을 완성하는 실천론이라고 말한다. 교리를 아무리 많이 알고, 역사를 꿰뚫어 본다 해도,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모든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서 말한 구원과 역사에 대한 모든 설명이 이제 결론으로 이어짐을 시사한다.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대답이 곧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다. 예전에는 동물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 삶을 통째로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상태로 계속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므로, ‘영적 예배’가 된다.
삶이 예배가 되려면, 우선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롬 12:2). 세상은 자기 만족과 이기심에 초점을 맞추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희생과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받은 자들이 그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서로 지체가 되어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롬 12:3-8)를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이“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는 말은, 단지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영적 위로, 공감, 돌봄 등 다양한 형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 12장 13절을 ‘디아코니아’의 본질로 해석하면서, 교회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여 캐리그마를 전하고, 그 말씀 안에서 교제를 이루어 코이노니아의 기쁨을 누린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흘러, 실제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봉사와 섬김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디아코니아다. 이 디아코니아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교회 공동체는 뼈가 살아나고 힘줄과 살이 붙어 큰 군대가 된다는 에스겔 37장의 비전을 실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한다. 가까운 예로, 해외 선교지에서 노트북이나 차량, 혹은 의료용품 등 필요한 물품을 요청한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 41-4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며,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따르는 것이다. 상대가 한 가지를 요청하면, 오히려 두 가지를 주며 섬기는 태도가 예수님의 제자의 자세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실천은 말로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이것은 교회가 개인적으로, 지역적으로 할 수 있는 봉사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이루며 협력해야 하는 ‘세계 선교의 비전’으로 확장된다. 장재형 목사는 G20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이 땅의 여러 나라에 세워지는 교회들이 협력하여 서로를 돕고, 또 다른 나라의 교회를 세워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어떤 선교지는 물질이 풍부한 반면, 영적 자원이 부족할 수 있고, 또 다른 선교지는 인적 자원은 풍부하지만, 재정이 취약할 수 있다. 교회가 한 몸이 되어 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줌으로써, 세계 도처에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될 수 있다. 이것이 실질적인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는’ 디아코니아의 확장된 모습이다.
로마서 12장 9절 이하에서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이 권면들은 모두 실천적 차원을 다룬다.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형제를 존경하고, 부지런히 주를 섬기며, 소망을 품고 환난을 참아내고, 기도를 끊임없이 하며, 결국 구체적인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 요구를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더 나아가 ‘그가 말하지 않은 필요’까지도 살펴보며 주는 태도가 참된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디아코니아를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초대교회 시절, 믿지 않는 이들이 교회를 보며 “보라, 저들이 서로 사랑함이 얼마나 큰가” 하고 놀랐던 것처럼,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참된 사랑과 봉사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이때에, 교회가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따라 실제적으로 섬긴다면 큰 감동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가 감당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이며, 복음 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그러나 이런 실천이 쉽지는 않다. 인간은 본성상 자기중심적이고, 여전히 세상 풍조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또한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려면, 교회 안에서도 ‘벽을 허무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원수 된 것을 허무는 능력이라 했는데, 이는 곧 교회 안에 발생하는 갈등이나 편견, 차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오해들을 십자가 정신으로 녹여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야 디아코니아가 가능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일곱 번이나 절을 하는 장면(창 33:3)을 읽을 때, 우리는 “나는 저런 순전한 화해의 몸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마 18:22),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용서를 요구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사랑의 수준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하려는 동기가 된다. 결국 교회가 서로에게 일곱 번 일흔 번이라도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다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사랑이 교회 안에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이스라엘’의 삶이다. 옛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넘어졌다면, 새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어 성도를 섬겨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전후로,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등 여러 서신에서 끊임없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 ‘사랑의 실천’이고, 그것이 결국 디아코니아의 완성이다.
나아가, 이러한 디아코니아는 복음 선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단순히 구제하고 봉사하는 행위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봉사를 해야 한다. 바울 역시 선교 사역 속에서 교회들을 돌보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으고, 이방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섬겼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디아코니아의 전형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봉사가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온정’으로 비춰지는 것을 넘어, ‘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구나’ 하고 체감할 수 있도록 복음적 메시지가 깔려 있어야 한다.
실천적 예배로서의 디아코니아는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믿는 자들끼리 서로의 필요를 살피고 채워 주는 일을 배울 때, 그것이 교회 밖으로 흘러나가 사회적인 봉사와 나눔으로 확장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내적으로 성도를 돌보지 않으면, 외적으로 아무리 화려한 선교와 이벤트를 펼쳐도 그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는 말 속에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들의 상황부터 세심히 살피고 도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내부에서부터 사랑이 넘쳐날 때,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 진정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로마서 12장의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핵심이며, 동시에 개인 신앙인이 확인해야 할 ‘진짜 예배’의 모습이다. 한 시간의 예배당 예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로부터 공급받은 은혜와 말씀을 가지고 실생활에서, 곁에 있는 이웃과 선교지, 여러 나라의 형제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삶이 곧 예배”라는 명제는, 결국 이 디아코니아가 실행될 때 완성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양을 먹이라 하신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먹인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필요한 말씀을 공급하고, 물질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며, 심적으로 곤고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양을 먹이는 사역’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각자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봉사에 참여해야 한다. 누군가는 가르치는 일을 잘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하고 사람을 돌보는 일을 잘할 것이다. 또 재정적으로 풍족한 사람은 물질을 나눌 수 있고,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이런 각양각색의 은사가 모여서 하나의 몸을 이룰 때, 교회는 큰 파급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마치 몸 안의 근육과 같아서, 뼈대만 든든한 상태로는 기능할 수 없는 인체가, 근육을 통해 움직이고 힘을 발휘하듯, 교회 공동체도 디아코니아를 통해 실질적인 활동력을 얻는다. 에스겔 37장이 말하는 ‘큰 군대’는 바로 이런 모습을 뜻한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일어나기 위해선 생기, 즉 성령의 역사도 필요하고, 그 뼈를 이어주는 힘줄과 살이 있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골조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 거기에 봉사와 사랑이라는 근육과 살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마른 뼈’와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로마서 12장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제자도’를 배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요 13:34), 또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다(요 13:15 참조).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이런 모든 장면이 디아코니아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엿보고, 복음을 접할 기회를 얻게 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디아코니아가 단순한 인도주의적 봉사나 자선 활동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적 예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산 제사인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는 바울의 권면(롬 12:1)을 곱씹으면서, 진정한 예배는 결국 자기희생의 현장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고 역설한다. 예배당에서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예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예배 후에 곧바로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에 전심전력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마서 12장 1-13절이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은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고, 세대의 풍조를 거슬러 마음을 새롭게 하며,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은사를 존중하고,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물고, 형제자매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베푸는 디아코니아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성장하고, 세상은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구원사’가 흐른다. 장재형 목사가 누차 강조해 온 바, 구원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고 종말론적 완성을 이루시는 전체 역사를 말하며, 그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와 교회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말씀을 듣고(캐리그마), 서로 교제하며(코이노니아), 봉사와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하는(디아코니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로마서 12장은 이 모든 과정을 농축한 실천 지침서다. 구원받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짜 삶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고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은 이런 물음을 다시금 생생하게 하며, 우리를 구체적 실천으로 재촉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오늘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누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내게 있는 것으로 얼마나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더 많이, 더 넉넉하게 줄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요, 로마서 12장이 말하는 참된 예배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실제로 드리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누구라도 한눈에 보아 “저들은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구원받은 뒤의 삶, 그리고 새 이스라엘로서의 사명이며, 장재형 목사가 계속해서 외쳐 온 복음의 실천적 결론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장다윗)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26절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설교 중 등장하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을 깊이 다루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강조해 왔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별설교를 하시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이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 뒤, 제자들을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설파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세 위격이 동시에 한 본질이심을 믿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야말로 참된 진리임을 누차 강조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첫째로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둘째로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셋째로 주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과 역사하심은 연합되어 있다. 특히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보혜사(헬라어 파라클레토스)라 불리우는 성령이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의 영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으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며 믿는 자들에게는 열려 있는 특별한 은혜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
본문에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성령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전 세계의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위대한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고 역설한다. 성령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의 공로 위에서 역사를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의 심령에 들어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며, 진리에 눈뜨게 하고, 힘과 능력을 부어주신다. 인간은 죄의 사슬에 매인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를 통해 임하시는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고 새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이 성령께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제자들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을 직접 체험했지만,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떠나가시는 상황 앞에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며, 오히려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심으로, 부활 이후 성령 강림의 새로운 역사를 확증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주님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앞두고도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선언하셨으니, 이것은 주님 스스로 부활의 세계를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죽음은 일시적이며, 사망 권세가 주님을 붙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이 선언하셨다는 점에서, 이미 승리의 자리에 계심을 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을 거듭 설파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결코 군주신론(Monarchianism)이나 양태론(Modalism)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인 위격을 지닌 동등한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성부 하나님의 피조물’처럼 종속되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낸 구속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하나님과 동일 본질)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대속의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 역시 참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구원 여정에 동행하신다.
이 삼위일체 신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왜 한 분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는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으시는 성령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셨다. 또한 그 예수님의 길을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 동시에 세 위격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거룩해지는 전 과정을 완성해 가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칭의(의롭다고 여김)를 얻는다.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속해서 거룩해져 간다. 삼위일체의 축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순서로 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고, 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늘 그 사랑 안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구원이 성령에 의해 각 사람 안에 적용되고, 그 적용된 구원이 구체적인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이끄는 과정이 곧 성령의 사역”이라고 소개한다.
구약의 시대는 성부 하나님의 통치와 언약,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는 시대였다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구속의 길을 여신 뒤, 이제는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놀라운 선언이 실제가 되는 장면이다. 구약시대처럼 특정한 선지자에게만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남종이나 여종, 늙은이든 젊은이든,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보편적인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한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진리의 영”과 동행하게 되는 진정한 기쁨이라 말한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주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의 사역을 통해 성령이 보내진다는 의미이다. 아무 대가 없이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선행됨으로써 열린 구원과 은혜의 문 안에서 성령이 임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십자가가 없이는 성령도 없다”라고 요약한다.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성령의 시대가 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조명해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이것은 그저 지식적인 암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기억과 인도하심이다. 우리가 죄에 빠져 있거나 혹은 인간적인 욕망에 잠식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주님의 길로 돌아가라, 그것이 죄다”라고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그 회개의 과정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위로하시며, 예수님의 의를 더욱 깊이 알게 하셔서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참된 자유를 맛보는 길”이라 부른다. 세상은 자유를 방종이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성령 안에서 살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을 성령강림절에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예수님이 “내가 떠나가도 너희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고, 그분이 너희를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있었으나, 먼 훗날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물리적 현존을 경험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누구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또 다른 보혜사”이며,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펼치신 ‘새 시대’의 시작이다.
보혜사(Paraclete)로 번역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원어상의 의미로 ‘곁에서 돕는 자’, ‘조력자’, ‘위로자’, ‘변호자’, ‘상담자’, ‘격려자’ 등 다채로운 뜻을 가진다. 영어로는 Comforter, Advocate, Counselor 등으로 번역된다. 장재형목사는 라틴어에서 Comfort가 ‘함께 힘을 준다’(com + fortis, fortis는 용기·힘)라는 의미라고 설명하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실 뿐 아니라 영적 능력과 담대함을 부어주시는 분이라고 역설한다. 믿는 자가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담대함은 성령의 능력이다.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을 때 성령이 임하셨고, 비로소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거센 핍박 속에서도 복음이 확장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고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믿음으로 뒤따르게 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성령의 내주하심이야말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몸된 성전이 되어 성령이 거하실 때,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지식이나 제도적 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직 삶의 모든 순간에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죄를 멀리하고 진리 가운데 거하려 애쓰게 된다. 이는 내적 동기가 달라지는 것이며, 더 이상 율법의 외적 강제나 종교적 의무감이 아닌, 성령 안에서 자발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이다.
이처럼 요한복음 14장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신비가 농축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원의 일을 성령이 믿는 자 각 사람에게 실제로 적용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다. 이 교리를 모르면 교회가 단순히 사람이 만든 종교 조직처럼 보이겠지만, 삼위일체의 경륜을 깨달으면 교회가 곧 ‘성령이 거하시는 공동체’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도 ‘성령의 전(殿)’이 되어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자,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돌보시고 변화시키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붙잡고 종말까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다. 혹 넘어지거나 죄를 범하는 순간에도,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회개와 거룩을 회복하는 길로 돌아서게 된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수많은 갈등과 상처가 성령의 치료와 위로로 해소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복음적 시각이다. 성령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서로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화해와 사랑의 길을 열어주며, 죄로 인해 무겁게 짓눌린 이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선물하신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자리에,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사실은 결코 작은 위로가 아니다. 지구상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세대에 속해 있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그 말씀을 사모하는 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의 특징이며,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교회의 보편성’이기도 하다. 교회가 가진 이 보편적 특성은, 결국 성령께서 만민에게 부어지심으로 실현된다. 교회 안에서 지위나 나이, 성별, 사회적 신분은 차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성령이 각각의 사람에게 다르게 은사를 주시되,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인도하신다. 이로써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체들이 협력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시기에, 거짓과 어둠, 미움과 폭력이 자리를 잡기 어렵다. 세상에서는 이익이나 권력, 욕망의 충돌로 인해 무수한 갈등이 벌어지지만,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섬기고 용서하며 자라나게 된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비전이다. 교회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령을 의지하여 조금씩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참빛을 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길”로 설명한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지니되, 동시에 세상 속에서 섬김을 실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언어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4장에 기록된 삼위일체적 구원의 약속,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약속을 통해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열렸음을 누차 강조해 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서, 그러나 세 위격으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다. 어떤 세력이 기독교의 교리를 흔들려 해도, 성경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삼위일체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이 삼위일체 신앙을 체득하고 경험하는 자들은,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며, 그 사실을 깨닫고 주를 영접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죄의 습관을 벗어나도록 도우신다. 회개하고 거듭난 심령은 성령 안에서 새 옷을 입게 되며, 점차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 그 결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세상에 나가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이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한복음 14장 이후로 교회는 핍박도 받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성령께서 결코 믿는 자들을 홀로 두지 않으심으로 중세·근대·현대를 거쳐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는 유효하며, 장재형목사는 이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역설한다.
Ⅱ. 성령 시대의 삶과 구원의 완성
장재형목사는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위에서, 성령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왔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죄 사함의 자유와 함께 거룩한 행실로 나아가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다. 구원이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의인’으로 칭함받지만, 동시에 옛 습관과 죄성을 씻어가는 성화의 과정에 돌입한다. 이 성화는 사람이 자기 의지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수적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대표적인 ‘성령장’이라고 부른다. 로마서 1장에서 7장까지 사도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죄를 대속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어떻게 의롭다 칭함을 받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8장에 이르러 성령론을 전개하며, 성령 안에서 신자가 누리는 자유를 선포한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우리는 정죄받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하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의 구원은 단순한 지적 선언을 넘어 실제 삶 속에서 능력을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아직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밭을 기경하고, 거짓과 탐욕과 음욕, 미움 등을 몰아내며,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성령강림절이나 교회의 각 예배 때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와 교육이 있어도, 본인이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 영적 변화가 현실로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을 ‘성령의 행전’이라고 부른다. 제목은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사도 개개인의 역량보다도 성령께서 그들을 어디로 이끄셨는지, 각 도시와 민족에서 어떻게 복음을 확장시키셨는지가 핵심 흐름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담대히 설교했을 때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 머무르지 않고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퍼지면서, 온 세상이 복음의 능력 앞에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제자들이 본래부터 가진 능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자 겁이 나서 뿔뿔이 흩어졌던 연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이처럼 성령의 권능이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며, 세상을 뒤흔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 교회는 이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성령과 동행하는 여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핍박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요한복음 14장 이후 15장, 16장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 미움의 본질은, 세상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 3:19). 빛이 비추어 드러나는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고백하기보다, 회개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세상 속에 강력히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성령 안에서 계속해서 죄를 씻고, 말씀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간다.
성령시대는 ‘고아처럼 버려진’ 시대가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위로하고 변호하며 가르치는 시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여러 각도에서 풀어내는데, 첫째 성령은 우리의 ‘위로자’(Comforter)로서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신다고 설명한다. 둘째 성령은 ‘변호자’(Advocate)로서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사단이 고소하려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들고 우리를 정죄당하지 않게 지켜주신다. 셋째로 성령은 ‘조력자’(Helper)로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실제적인 능력과 지혜를 부어주신다. 넷째, 성령은 ‘상담자’(Counselor)로서 우리가 무지하고 혼란스러울 때 길을 제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신다. 이러한 사역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이 핵심이다.
장재형목사는 더욱이, 성령 강림 이후에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나 성령을 받는다고 설파한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임금처럼 선택된 소수에게 성령이 임했지만, 이제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이 임하리라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요엘 2:28-29)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를 인용하며, 오순절에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임한 성령의 역사를 해석했다. 이는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적 배경의 벽을 허무는 사건이었고, 교회가 가야 할 방향성을 보여준다. 교회는 인종과 언어, 지위와 성별을 초월해 하나로 결속된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계층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지만, 그들이 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서로 섬기는 이유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신다.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을 받아 말씀을 풀고 가르치며, 어떤 사람은 믿음이나 병 고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변의 은사를 받는다(고전 12장).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은사가 한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장재형목사는 어느 한 가지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며,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은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교회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며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이 말하는 균형을 벗어나는 태도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모든 은사는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은사를 사모하되 은사로 인해 교만하거나 타인을 무시하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를 위해 은사를 베푸실 뿐 아니라, 개인의 거룩도 세워주신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거룩한 옷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고, 그래서 회개와 씻김이 필요하다. 묵은 죄성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라며 탄식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고 선포한다. 이는 성령 안에서 승리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깊은 중독이나 어두운 습관 속에서도 성령께 나아가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을 “내적 자유와 해방의 영”이라 부른다. 인간이 자기 의지만으로는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을 끊고, 새 피조물로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은 “계속해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27)고 했다. 많은 신자들이 길게 기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집중력이 흐려져 몇 분 만에 기도를 포기하기 쉽다. 그런데 방언을 받으면 내 지성이 간섭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성령이 기도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에,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있다. 방언은 나를 유익하게 하는 은사이며, 예언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고전 14장). 방언을 못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허락하신다면 방언이든 예언이든 무엇이든 간절히 사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장재형목사는 조언한다.
이처럼 성령은 교회 안에서 풍성한 열매와 은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교회 역사를 돌아봐도, 위대한 부흥의 시기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의 급성장, 중세 말 종교개혁, 근대 대각성운동, 현대의 세계선교 확장은 모두 성령께서 움직이신 결과다. 그러므로 교회가 쇠퇴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성령의 불이 식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령 없는 교회는 기계적인 종교 활동만 반복하면서 세상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교회는 제도나 형식보다도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참된 변화로 이끈다.
삼위일체 신앙은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보내심을 받아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이제 성령께서 그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 확장하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 재림 시에 이루어지겠지만, 그 재림의 날까지 성령께서 매 순간 우리를 인도하시고 거룩하게 빚어가신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를 세우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는 신부로서 교회를 단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의 성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야 한다. 성령이 개인의 성화를 도우실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 교제를 통해 서로를 세우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중보할 때 거룩이 더욱 공고해진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할 것을 예언한다(계 21장). 그날까지 성령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돌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성령께서 우리를 변호하신다”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성령은 그 사실을 계속해서 우리 양심에 증거하며 확신케 하신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심지어 교회 안에 분열과 갈등이 있다 해도, 성령이 떠나지 않으시는 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성령께서 애통해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변화의 돌파구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성령 시대의 삶이란,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혜,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고, 이제 성령 안에서 거룩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작은 걸음씩 전진할 때, 내 안의 옛 자아는 줄어들고 예수님의 형상이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교회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 확장되는 과정”이라 요약한다.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존재가 될수록, 세상도 점차 복음 앞에 문을 여는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난 보혜사 성령의 약속과 삼위일체 구원론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며, 이를 통해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믿음의 유산을 지켜가면서 성령의 현존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개인으로 보면, 성령의 내주하심을 날마다 사모하고, 말씀과 기도로 성령과 교통함으로 죄를 물리치고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 한다.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는, 성령이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신 은사를 합력하여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고,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며, 세상을 향해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사역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우리 안에 각인시키고 열매 맺게 하시는 성령”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섭리가 펼쳐져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는 결코 홀로 버려지거나 길을 잃지 않는다. 보혜사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이끄시고, 힘주고, 회개케 하며, 기도케 하신다. 이를 믿고 붙드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환난이나 박해도 두렵지 않다. 죽음 너머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성령 안에서 매일 새로워지며 사랑과 기쁨과 평안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발원하는 성령의 약속이 요엘서 2장, 사도행전 2장, 로마서 8장, 갈라디아서 5장, 고린도전서 12~14장 등 신약 곳곳에서 구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신약 교회의 본질적인 힘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동일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붙들기만 하면 된다고 강조한다. 이 말씀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그리고 성령의 인도 안에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성령 시대를 맞아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예배하고 교제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우리는 고아처럼 남겨지지 않았다. 보혜사 성령이 모든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 누리게 하신다.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구약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처럼 드물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서로 다른 은사를 나누고, 예수님을 증언하며, 세상에 나가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특권을 누린다. 바로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줄곧 역설해 온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곧 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 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