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여정
로마서 12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구원받은 존재로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구원의 심오한 비밀을 가르쳤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이 흐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 안에 중심사(主流史)와 주변사(周邊史)가 있으며,중심사는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통해 역사가 이끌려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 이스라엘(New Israel)’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의 구원론과 역사론을 토대로, 곧 구원받은 후에 시작되는 새로운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바울이 말하는 새 이스라엘은 우리의 이야기로 적용될 수 있다. 구약에서 선택받은 옛 이스라엘(Old Israel)이 존재했고, 신약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한 새 이스라엘이 생겨났다. 바울은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새 이스라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하나님의 구원사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설명한다. 옛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불순종함으로 인해 깎여 나간 가지와도 같고, 이방인들이 그 빈자리에 접붙임 받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곧 교회의 기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새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로,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중심사를 형성하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곧 하나님이 선택해 구별해놓으신 자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며 세상에 섞여버렸고, 그 결과 노아의 심판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세상에 물들어 죄의 길로 간다면 그 심판이 임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에서 강조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짝하여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드러나고, 새 이스라엘이 일어설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이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종말론적 사명으로 연결해 설명한다.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종말론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는 단지 종말의 징조를 예언하고 두려워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도록 부르심받았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과 49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나타난 ‘두루마기를 빠는’ 이미지는 ‘행실을 깨끗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우리의 일상에서도 계속 그 옷을 깨끗이 빨아야 함을 뜻한다. 세상적인 죄의 습관을 버리고, 성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새 이스라엘의 표지다.
바울이 구원론(롬 1-8장), 역사론(롬 9-11장)을 설명하고 이어서 로마서 12장에서 ‘실천론’을 말하는 흐름은 매우 논리적이다. 구원을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자라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삶 전체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이 곧 예배이며, 이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형식적 예배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으로 확대된다. 장재형 목사가 여러 예배와 설교에서 “삶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이 점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헌신을 뜻한다.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자기 것’을 우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우리는 먼저 남을 위해 희생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 이스라엘이 걷는 길이며, 역사에서 중심사로서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강조한다. 이 세대란 곧 세상의 가치관과 풍조를 의미한다. 세상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과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이기심’이 지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 마음이 곧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역사를 읽는 눈’과 ‘종말론적 소명’을 함께 가지라고 거듭 강조한다. 우리가 단순히 개인 구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그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구원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택하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자기 자랑이나 특권의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택하심을 통해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봉사하고 희생해야 함을 가리킨다.
특히 창세기에서 야곱의 이야기는 매우 시사적이다. 야곱이 에서와 어떻게 화해했는지를 보면, 그는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을 함으로써 형과 화목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나아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 나아가 사회와 민족 간의 갈등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은 ‘화해와 용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막힌 담을 허무는 정신’을 늘 강조하며, 십자가의 정신이 그 벽을 허무는 열쇠임을 가르친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서 바울은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했는데, 곧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가 구현된 곳이다. 교회는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로를 원수로 만들고 벽을 쌓는 세상 풍조에 맞서 ‘코이노니아(koinonia)’를 실현해야 한다.
‘코이노니아’는 그리스어로 ‘교제’ 혹은 ‘사귐’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무는 영적 교제를 뜻한다. 바울은 ‘캐리그마(kerygma)’, 즉 말씀의 선포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고, 이어서 이 말씀을 받은 자들이 함께 교제를 이루는 ‘코이노니아’를 강조했다. 우리가 구원론과 역사론을 깨달았다면, 그다음에는 교회 안에서 서로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참된 교제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제 속에서 형제적 사랑이 실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 곧 새 이스라엘의 증거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코이노니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졌다면, 그다음 단계인 ‘디아코니아(diakonia)’로 나아가야 한다. ‘디아코니아’는 ‘봉사’ 혹은 ‘섬김’을 의미한다. 로마서 12장 13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이것이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사랑한다면, 실제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 사도도 “네가 ‘평안히 가라, 따뜻하게 지내라, 배부르게 되라’고 말만 하고,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약 2:16)고 지적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마서 12장 1-13절은 우리의 ‘실천적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바울은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을 우리식 표현으로 풀어내며, 실제로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 많이 베풀라고 권면한다. 만약 선교지에서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만’ 주는 데 그치지 말고, 가능한 한 더 보내 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라”는 황금률(마 5:41)이며,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는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서, 서로의 쓸 것을 공급하고, 한 몸이 되어 세계 곳곳에 복음과 사랑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핵심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역사를 아는 자라면, 이제 그 믿음을 ‘실천적인 삶’으로 증명하라는 것이다. 구원은 단순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세상 풍조와 반대되는 길을 가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희생의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곧 ‘영적 예배’가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원리를 교회 안팎에서 강조하며,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섬김이 진정한 예배라고 역설한다. 교회는 여러 나라의 선교지를 세워나가고, 서로 도우며,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공급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뤄가야 한다. 영적 골조(뼈대)가 든든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힘줄과 살(실질적인 사랑과 봉사)이 함께 붙어야 교회 공동체가 큰 군대처럼 일어선다는 에스겔 37장의 비전도 우리의 실천을 촉구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로 뼈대를 세워주셨다면, 이제는 그것에 힘줄과 살을 더해 생기 넘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곧 디아코니아 정신이며, 로마서 12장이 가르치는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이다.
이 모든 가르침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몸소 보여주신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명하셨다(요 21:15-17).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의 양을 먹이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선교지와 이웃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함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이 새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로마서 12장의 메시지와 장재형 목사의 실제적 가르침이 가리키는 핵심이다.
2. 성도의 디아코니아와 실천적 예배
새 이스라엘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디아코니아와 실천적 예배가 따라와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제시하는 구체적인 권면들은,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이, 구원의 교리(롬 1-8장)와 이스라엘·새 이스라엘의 역사론(롬 9-11장)을 완성하는 실천론이라고 말한다. 교리를 아무리 많이 알고, 역사를 꿰뚫어 본다 해도,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모든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에서 말한 구원과 역사에 대한 모든 설명이 이제 결론으로 이어짐을 시사한다.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대답이 곧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다. 예전에는 동물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 삶을 통째로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상태로 계속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므로, ‘영적 예배’가 된다.
삶이 예배가 되려면, 우선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롬 12:2). 세상은 자기 만족과 이기심에 초점을 맞추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희생과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받은 자들이 그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서로 지체가 되어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롬 12:3-8)를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이“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는 말은, 단지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영적 위로, 공감, 돌봄 등 다양한 형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 12장 13절을 ‘디아코니아’의 본질로 해석하면서, 교회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여 캐리그마를 전하고, 그 말씀 안에서 교제를 이루어 코이노니아의 기쁨을 누린다. 그런데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흘러, 실제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봉사와 섬김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디아코니아다. 이 디아코니아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교회 공동체는 뼈가 살아나고 힘줄과 살이 붙어 큰 군대가 된다는 에스겔 37장의 비전을 실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한다. 가까운 예로, 해외 선교지에서 노트북이나 차량, 혹은 의료용품 등 필요한 물품을 요청한다면, 그것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 41-4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며,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따르는 것이다. 상대가 한 가지를 요청하면, 오히려 두 가지를 주며 섬기는 태도가 예수님의 제자의 자세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실천은 말로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이것은 교회가 개인적으로, 지역적으로 할 수 있는 봉사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를 이루며 협력해야 하는 ‘세계 선교의 비전’으로 확장된다. 장재형 목사는 G20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이 땅의 여러 나라에 세워지는 교회들이 협력하여 서로를 돕고, 또 다른 나라의 교회를 세워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어떤 선교지는 물질이 풍부한 반면, 영적 자원이 부족할 수 있고, 또 다른 선교지는 인적 자원은 풍부하지만, 재정이 취약할 수 있다. 교회가 한 몸이 되어 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줌으로써, 세계 도처에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될 수 있다. 이것이 실질적인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는’ 디아코니아의 확장된 모습이다.
로마서 12장 9절 이하에서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이 권면들은 모두 실천적 차원을 다룬다.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형제를 존경하고, 부지런히 주를 섬기며, 소망을 품고 환난을 참아내고, 기도를 끊임없이 하며, 결국 구체적인 도움을 주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 요구를 적극적으로 들어주고, 더 나아가 ‘그가 말하지 않은 필요’까지도 살펴보며 주는 태도가 참된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디아코니아를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초대교회 시절, 믿지 않는 이들이 교회를 보며 “보라, 저들이 서로 사랑함이 얼마나 큰가” 하고 놀랐던 것처럼,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참된 사랑과 봉사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이때에, 교회가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따라 실제적으로 섬긴다면 큰 감동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가 감당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이며, 복음 전파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그러나 이런 실천이 쉽지는 않다. 인간은 본성상 자기중심적이고, 여전히 세상 풍조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또한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려면, 교회 안에서도 ‘벽을 허무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원수 된 것을 허무는 능력이라 했는데, 이는 곧 교회 안에 발생하는 갈등이나 편견, 차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오해들을 십자가 정신으로 녹여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야 디아코니아가 가능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일곱 번이나 절을 하는 장면(창 33:3)을 읽을 때, 우리는 “나는 저런 순전한 화해의 몸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마 18:22),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용서를 요구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사랑의 수준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하려는 동기가 된다. 결국 교회가 서로에게 일곱 번 일흔 번이라도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다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사랑이 교회 안에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이스라엘’의 삶이다. 옛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넘어졌다면, 새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날마다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어 성도를 섬겨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전후로,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등 여러 서신에서 끊임없이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 ‘사랑의 실천’이고, 그것이 결국 디아코니아의 완성이다.
나아가, 이러한 디아코니아는 복음 선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단순히 구제하고 봉사하는 행위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봉사를 해야 한다. 바울 역시 선교 사역 속에서 교회들을 돌보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으고, 이방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섬겼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디아코니아의 전형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봉사가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온정’으로 비춰지는 것을 넘어, ‘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구나’ 하고 체감할 수 있도록 복음적 메시지가 깔려 있어야 한다.
실천적 예배로서의 디아코니아는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믿는 자들끼리 서로의 필요를 살피고 채워 주는 일을 배울 때, 그것이 교회 밖으로 흘러나가 사회적인 봉사와 나눔으로 확장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내적으로 성도를 돌보지 않으면, 외적으로 아무리 화려한 선교와 이벤트를 펼쳐도 그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는 말 속에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들의 상황부터 세심히 살피고 도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내부에서부터 사랑이 넘쳐날 때,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 진정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로마서 12장의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핵심이며, 동시에 개인 신앙인이 확인해야 할 ‘진짜 예배’의 모습이다. 한 시간의 예배당 예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로부터 공급받은 은혜와 말씀을 가지고 실생활에서, 곁에 있는 이웃과 선교지, 여러 나라의 형제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삶이 곧 예배”라는 명제는, 결국 이 디아코니아가 실행될 때 완성된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주님의 양을 먹이라 하신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먹인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필요한 말씀을 공급하고, 물질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며, 심적으로 곤고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양을 먹이는 사역’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각자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봉사에 참여해야 한다. 누군가는 가르치는 일을 잘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하고 사람을 돌보는 일을 잘할 것이다. 또 재정적으로 풍족한 사람은 물질을 나눌 수 있고,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이런 각양각색의 은사가 모여서 하나의 몸을 이룰 때, 교회는 큰 파급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마치 몸 안의 근육과 같아서, 뼈대만 든든한 상태로는 기능할 수 없는 인체가, 근육을 통해 움직이고 힘을 발휘하듯, 교회 공동체도 디아코니아를 통해 실질적인 활동력을 얻는다. 에스겔 37장이 말하는 ‘큰 군대’는 바로 이런 모습을 뜻한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일어나기 위해선 생기, 즉 성령의 역사도 필요하고, 그 뼈를 이어주는 힘줄과 살이 있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골조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 거기에 봉사와 사랑이라는 근육과 살을 덧붙여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마른 뼈’와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로마서 12장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제자도’를 배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요 13:34), 또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다(요 13:15 참조).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굶주린 무리를 먹이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이런 모든 장면이 디아코니아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엿보고, 복음을 접할 기회를 얻게 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디아코니아가 단순한 인도주의적 봉사나 자선 활동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적 예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산 제사인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는 바울의 권면(롬 12:1)을 곱씹으면서, 진정한 예배는 결국 자기희생의 현장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고 역설한다. 예배당에서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예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예배 후에 곧바로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에 전심전력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로마서 12장 1-13절이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은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고, 세대의 풍조를 거슬러 마음을 새롭게 하며,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은사를 존중하고,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물고, 형제자매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베푸는 디아코니아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성장하고, 세상은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구원사’가 흐른다. 장재형 목사가 누차 강조해 온 바, 구원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고 종말론적 완성을 이루시는 전체 역사를 말하며, 그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와 교회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말씀을 듣고(캐리그마), 서로 교제하며(코이노니아), 봉사와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하는(디아코니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로마서 12장은 이 모든 과정을 농축한 실천 지침서다. 구원받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짜 삶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고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은 이런 물음을 다시금 생생하게 하며, 우리를 구체적 실천으로 재촉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오늘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누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내게 있는 것으로 얼마나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더 많이, 더 넉넉하게 줄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요, 로마서 12장이 말하는 참된 예배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실제로 드리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는, 누구라도 한눈에 보아 “저들은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구원받은 뒤의 삶, 그리고 새 이스라엘로서의 사명이며, 장재형 목사가 계속해서 외쳐 온 복음의 실천적 결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