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시대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Ⅰ. 삼위일체의 신비와 보혜사 성령의 약속

장재형목사(장다윗)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26절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설교 중 등장하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을 깊이 다루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강조해 왔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별설교를 하시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이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 뒤, 제자들을 결코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설파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세 위격이 동시에 한 본질이심을 믿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야말로 참된 진리임을 누차 강조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첫째로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둘째로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셋째로 주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과 역사하심은 연합되어 있다. 특히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보혜사(헬라어 파라클레토스)라 불리우는 성령이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의 영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으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며 믿는 자들에게는 열려 있는 특별한 은혜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

본문에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성령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전 세계의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위대한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고 역설한다. 성령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의 공로 위에서 역사를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의 심령에 들어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며, 진리에 눈뜨게 하고, 힘과 능력을 부어주신다. 인간은 죄의 사슬에 매인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를 통해 임하시는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고 새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이 성령께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제자들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을 직접 체험했지만,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떠나가시는 상황 앞에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며, 오히려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심으로, 부활 이후 성령 강림의 새로운 역사를 확증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주님은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앞두고도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선언하셨으니, 이것은 주님 스스로 부활의 세계를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죽음은 일시적이며, 사망 권세가 주님을 붙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이 선언하셨다는 점에서, 이미 승리의 자리에 계심을 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을 거듭 설파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결코 군주신론(Monarchianism)이나 양태론(Modalism)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인 위격을 지닌 동등한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성부 하나님의 피조물’처럼 종속되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낸 구속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하나님과 동일 본질)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대속의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 역시 참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구원 여정에 동행하신다.

이 삼위일체 신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왜 한 분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는 성자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으시는 성령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셨다. 또한 그 예수님의 길을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 동시에 세 위격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거룩해지는 전 과정을 완성해 가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칭의(의롭다고 여김)를 얻는다. 그리고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속해서 거룩해져 간다. 삼위일체의 축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순서로 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고, 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늘 그 사랑 안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구원이 성령에 의해 각 사람 안에 적용되고, 그 적용된 구원이 구체적인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이끄는 과정이 곧 성령의 사역”이라고 소개한다.

구약의 시대는 성부 하나님의 통치와 언약,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는 시대였다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구속의 길을 여신 뒤, 이제는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놀라운 선언이 실제가 되는 장면이다. 구약시대처럼 특정한 선지자에게만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남종이나 여종, 늙은이든 젊은이든,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보편적인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한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진리의 영”과 동행하게 되는 진정한 기쁨이라 말한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주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보내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의 사역을 통해 성령이 보내진다는 의미이다. 아무 대가 없이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선행됨으로써 열린 구원과 은혜의 문 안에서 성령이 임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십자가가 없이는 성령도 없다”라고 요약한다.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성령의 시대가 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조명해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이것은 그저 지식적인 암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능력으로 변화시키는 기억과 인도하심이다. 우리가 죄에 빠져 있거나 혹은 인간적인 욕망에 잠식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주님의 길로 돌아가라, 그것이 죄다”라고 깨닫게 해주신다. 그리고 그 회개의 과정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위로하시며, 예수님의 의를 더욱 깊이 알게 하셔서 감사의 찬송을 드리게 만든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참된 자유를 맛보는 길”이라 부른다. 세상은 자유를 방종이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성령 안에서 살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을 성령강림절에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예수님이 “내가 떠나가도 너희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고, 그분이 너희를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있었으나, 먼 훗날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물리적 현존을 경험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누구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또 다른 보혜사”이며,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펼치신 ‘새 시대’의 시작이다.

보혜사(Paraclete)로 번역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원어상의 의미로 ‘곁에서 돕는 자’, ‘조력자’, ‘위로자’, ‘변호자’, ‘상담자’, ‘격려자’ 등 다채로운 뜻을 가진다. 영어로는 Comforter, Advocate, Counselor 등으로 번역된다. 장재형목사는 라틴어에서 Comfort가 ‘함께 힘을 준다’(com + fortis, fortis는 용기·힘)라는 의미라고 설명하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실 뿐 아니라 영적 능력과 담대함을 부어주시는 분이라고 역설한다. 믿는 자가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담대함은 성령의 능력이다.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을 때 성령이 임하셨고, 비로소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거센 핍박 속에서도 복음이 확장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고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믿음으로 뒤따르게 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성령의 내주하심이야말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몸된 성전이 되어 성령이 거하실 때,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지식이나 제도적 틀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직 삶의 모든 순간에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죄를 멀리하고 진리 가운데 거하려 애쓰게 된다. 이는 내적 동기가 달라지는 것이며, 더 이상 율법의 외적 강제나 종교적 의무감이 아닌, 성령 안에서 자발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이다.

이처럼 요한복음 14장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신비가 농축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원의 일을 성령이 믿는 자 각 사람에게 실제로 적용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다. 이 교리를 모르면 교회가 단순히 사람이 만든 종교 조직처럼 보이겠지만, 삼위일체의 경륜을 깨달으면 교회가 곧 ‘성령이 거하시는 공동체’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도 ‘성령의 전(殿)’이 되어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자,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돌보시고 변화시키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붙잡고 종말까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다. 혹 넘어지거나 죄를 범하는 순간에도,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회개와 거룩을 회복하는 길로 돌아서게 된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수많은 갈등과 상처가 성령의 치료와 위로로 해소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복음적 시각이다. 성령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서로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화해와 사랑의 길을 열어주며, 죄로 인해 무겁게 짓눌린 이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선물하신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자리에,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사실은 결코 작은 위로가 아니다. 지구상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세대에 속해 있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그 말씀을 사모하는 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의 특징이며,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교회의 보편성’이기도 하다. 교회가 가진 이 보편적 특성은, 결국 성령께서 만민에게 부어지심으로 실현된다. 교회 안에서 지위나 나이, 성별, 사회적 신분은 차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성령이 각각의 사람에게 다르게 은사를 주시되,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인도하신다. 이로써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체들이 협력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시기에, 거짓과 어둠, 미움과 폭력이 자리를 잡기 어렵다. 세상에서는 이익이나 권력, 욕망의 충돌로 인해 무수한 갈등이 벌어지지만,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섬기고 용서하며 자라나게 된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비전이다. 교회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령을 의지하여 조금씩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참빛을 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길”로 설명한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지니되, 동시에 세상 속에서 섬김을 실천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언어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4장에 기록된 삼위일체적 구원의 약속,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약속을 통해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열렸음을 누차 강조해 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서, 그러나 세 위격으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다. 어떤 세력이 기독교의 교리를 흔들려 해도, 성경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삼위일체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또한 이 삼위일체 신앙을 체득하고 경험하는 자들은,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며, 그 사실을 깨닫고 주를 영접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죄의 습관을 벗어나도록 도우신다. 회개하고 거듭난 심령은 성령 안에서 새 옷을 입게 되며, 점차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 그 결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세상에 나가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이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한복음 14장 이후로 교회는 핍박도 받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성령께서 결코 믿는 자들을 홀로 두지 않으심으로 중세·근대·현대를 거쳐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는 유효하며, 장재형목사는 이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역설한다.

Ⅱ. 성령 시대의 삶과 구원의 완성

장재형목사는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위에서, 성령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왔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죄 사함의 자유와 함께 거룩한 행실로 나아가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다. 구원이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이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의인’으로 칭함받지만, 동시에 옛 습관과 죄성을 씻어가는 성화의 과정에 돌입한다. 이 성화는 사람이 자기 의지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수적이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8장을 대표적인 ‘성령장’이라고 부른다. 로마서 1장에서 7장까지 사도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죄를 대속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어떻게 의롭다 칭함을 받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8장에 이르러 성령론을 전개하며, 성령 안에서 신자가 누리는 자유를 선포한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우리는 정죄받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하게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의 구원은 단순한 지적 선언을 넘어 실제 삶 속에서 능력을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면 아직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밭을 기경하고, 거짓과 탐욕과 음욕, 미움 등을 몰아내며,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장재형목사는 성령강림절이나 교회의 각 예배 때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와 교육이 있어도, 본인이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 영적 변화가 현실로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을 ‘성령의 행전’이라고 부른다. 제목은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이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사도 개개인의 역량보다도 성령께서 그들을 어디로 이끄셨는지, 각 도시와 민족에서 어떻게 복음을 확장시키셨는지가 핵심 흐름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가 담대히 설교했을 때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 머무르지 않고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퍼지면서, 온 세상이 복음의 능력 앞에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제자들이 본래부터 가진 능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자 겁이 나서 뿔뿔이 흩어졌던 연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이처럼 성령의 권능이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며, 세상을 뒤흔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 교회는 이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성령과 동행하는 여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핍박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요한복음 14장 이후 15장, 16장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 미움의 본질은, 세상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 3:19). 빛이 비추어 드러나는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고백하기보다, 회개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세상 속에 강력히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성령 안에서 계속해서 죄를 씻고, 말씀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간다.

성령시대는 ‘고아처럼 버려진’ 시대가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위로하고 변호하며 가르치는 시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여러 각도에서 풀어내는데, 첫째 성령은 우리의 ‘위로자’(Comforter)로서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신다고 설명한다. 둘째 성령은 ‘변호자’(Advocate)로서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사단이 고소하려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들고 우리를 정죄당하지 않게 지켜주신다. 셋째로 성령은 ‘조력자’(Helper)로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실제적인 능력과 지혜를 부어주신다. 넷째, 성령은 ‘상담자’(Counselor)로서 우리가 무지하고 혼란스러울 때 길을 제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신다. 이러한 사역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이 핵심이다.

장재형목사는 더욱이, 성령 강림 이후에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나 성령을 받는다고 설파한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임금처럼 선택된 소수에게 성령이 임했지만, 이제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이 임하리라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요엘 2:28-29)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를 인용하며, 오순절에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임한 성령의 역사를 해석했다. 이는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적 배경의 벽을 허무는 사건이었고, 교회가 가야 할 방향성을 보여준다. 교회는 인종과 언어, 지위와 성별을 초월해 하나로 결속된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계층과 배경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지만, 그들이 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서로 섬기는 이유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신다.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을 받아 말씀을 풀고 가르치며, 어떤 사람은 믿음이나 병 고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변의 은사를 받는다(고전 12장).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은사가 한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장재형목사는 어느 한 가지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며,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은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교회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며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이 말하는 균형을 벗어나는 태도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모든 은사는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은사를 사모하되 은사로 인해 교만하거나 타인을 무시하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를 위해 은사를 베푸실 뿐 아니라, 개인의 거룩도 세워주신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거룩한 옷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고, 그래서 회개와 씻김이 필요하다. 묵은 죄성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라며 탄식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고 선포한다. 이는 성령 안에서 승리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깊은 중독이나 어두운 습관 속에서도 성령께 나아가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을 “내적 자유와 해방의 영”이라 부른다. 인간이 자기 의지만으로는 끊을 수 없는 죄의 사슬을 끊고, 새 피조물로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은 “계속해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27)고 했다. 많은 신자들이 길게 기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집중력이 흐려져 몇 분 만에 기도를 포기하기 쉽다. 그런데 방언을 받으면 내 지성이 간섭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성령이 기도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에,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있다. 방언은 나를 유익하게 하는 은사이며, 예언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고전 14장). 방언을 못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허락하신다면 방언이든 예언이든 무엇이든 간절히 사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장재형목사는 조언한다.

이처럼 성령은 교회 안에서 풍성한 열매와 은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교회 역사를 돌아봐도, 위대한 부흥의 시기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의 급성장, 중세 말 종교개혁, 근대 대각성운동, 현대의 세계선교 확장은 모두 성령께서 움직이신 결과다. 그러므로 교회가 쇠퇴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성령의 불이 식어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령 없는 교회는 기계적인 종교 활동만 반복하면서 세상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교회는 제도나 형식보다도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참된 변화로 이끈다.

삼위일체 신앙은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보내심을 받아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이제 성령께서 그 구원을 각 사람에게 적용하시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 확장하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 재림 시에 이루어지겠지만, 그 재림의 날까지 성령께서 매 순간 우리를 인도하시고 거룩하게 빚어가신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를 세우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는 신부로서 교회를 단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의 성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야 한다. 성령이 개인의 성화를 도우실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 교제를 통해 서로를 세우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중보할 때 거룩이 더욱 공고해진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할 것을 예언한다(계 21장). 그날까지 성령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돌보신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성령께서 우리를 변호하신다”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성령은 그 사실을 계속해서 우리 양심에 증거하며 확신케 하신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심지어 교회 안에 분열과 갈등이 있다 해도, 성령이 떠나지 않으시는 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성령께서 애통해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변화의 돌파구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성령 시대의 삶이란,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부의 사랑, 성자의 은혜,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았고, 이제 성령 안에서 거룩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작은 걸음씩 전진할 때, 내 안의 옛 자아는 줄어들고 예수님의 형상이 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교회 안에, 그리고 세상 안에 확장되는 과정”이라 요약한다.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 존재가 될수록, 세상도 점차 복음 앞에 문을 여는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난 보혜사 성령의 약속과 삼위일체 구원론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며, 이를 통해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믿음의 유산을 지켜가면서 성령의 현존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개인으로 보면, 성령의 내주하심을 날마다 사모하고, 말씀과 기도로 성령과 교통함으로 죄를 물리치고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 한다.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는, 성령이 각 지체에게 나누어주신 은사를 합력하여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고,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며, 세상을 향해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사역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을 우리 안에 각인시키고 열매 맺게 하시는 성령”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섭리가 펼쳐져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는 결코 홀로 버려지거나 길을 잃지 않는다. 보혜사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이끄시고, 힘주고, 회개케 하며, 기도케 하신다. 이를 믿고 붙드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환난이나 박해도 두렵지 않다. 죽음 너머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성령 안에서 매일 새로워지며 사랑과 기쁨과 평안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발원하는 성령의 약속이 요엘서 2장, 사도행전 2장, 로마서 8장, 갈라디아서 5장, 고린도전서 12~14장 등 신약 곳곳에서 구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것이 신약 교회의 본질적인 힘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동일한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붙들기만 하면 된다고 강조한다. 이 말씀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그리고 성령의 인도 안에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성령 시대를 맞아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예배하고 교제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우리는 고아처럼 남겨지지 않았다. 보혜사 성령이 모든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의 구원을 통해 누리게 하신다.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구약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처럼 드물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서로 다른 은사를 나누고, 예수님을 증언하며, 세상에 나가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 특권을 누린다. 바로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줄곧 역설해 온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곧 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 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gracegazett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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