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치열한 교차점에서: 성령이 빚어내는 거룩한 일상,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1. 영혼의 캔버스 위에 드리운 명암(Chiaroscuro)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의 걸작 <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을 가만히 응시해 봅니다. 어두침침한 세관 안, 탐욕스럽게 동전을 세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한 줄기 강력한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빛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조명이 아니라, 죄인 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부할 수 없는 은혜의 손짓입니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전율은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 즉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통해 인간 내면에 공존하는 두 세계를 시각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이 캔버스처럼 매일 치열한 전장이 됩니다. 거룩한 부르심의 빛과 여전히 옛 습관에 머물러 있는 육체의 어둠이 충돌하는 곳,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이 소리 없는 전쟁에 대해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을 제시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갈라디아서 5장 강해를 통해, 이 싸움을 단순한 도덕적 갈등이 아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대립하는 영적 실존의 문제로 조명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 마태오가 빛을 따라나설 것인가, 아니면 다시 어둠 속의 동전으로 눈을 돌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 찰나의 순간처럼, 우리는 매일 성령을 따를 것인지 육체의 욕망에 굴복할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외친 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명령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법정의 선언을 넘어 삶의 향기로

신앙의 여정은 ‘신분’의 변화에서 시작하여 ‘수준’의 변화로 나아가는 긴 순례와도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 즉 칭의(Justification)의 감격에는 익숙하지만, 그 이후의 삶인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에서는 자주 넘어지곤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예리하게 파고듭니다. 칭의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단회적이고 법적인 선언이라면, 성화는 그 선언을 받은 자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법정의 판결봉 소리가 우리를 감옥에서 나오게 했다면, 이제는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실질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머리로는 선을 알지만 몸은 악을 행하는 모순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방증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이 지식의 축적으로 머무를 때 생명력을 잃는다고 경고하며, 오직 보혜사 성령의 내주하심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로마서가 증언하듯,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닫힌 입술을 열어 찬양하게 하는 실제적인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며, 은혜 없는 노력은 율법주의의 멍에가 될 뿐입니다.

3. 하나 된 생명에서 피어나는 다채로운 성품

육체의 일은 본능적이고 파괴적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열된 음행, 우상숭배, 원수 맺는 것, 분냄과 같은 목록들은 오늘날 현대 사회의 자화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육체의 일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 심각한 장애물임을 지적하며, 특히 반복되는 죄가 영혼을 얼마나 딱딱하게 굳어지게 만드는지 경고합니다. 죄의 유혹은 달콤해 보이지만, 그 끝은 파멸이며 영혼의 고립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는 생명력이 넘치는 통합적인 성품으로 나타납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열매들’이라는 복수형 대신 단수형 ‘열매(fruit)’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각각 따로 노는 구슬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하나의 생명 나무에서 맺히는 맛과 향이 다른 하나의 과실과도 같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해석에 따르면, 희락은 상황이 좋을 때만 웃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초월해 은혜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또한 화평은 내면의 고요함이 외부의 관계를 치유하는 능력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 아홉 가지 성품은 우리가 억지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건강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가 맺히듯, 우리가 성령 안에 깊이 뿌리 내릴 때 저절로 맺혀지는 은혜의 산물입니다. 이것은 예배당 안에서만 유효한 덕목이 아닙니다. 재정을 다루는 투명함, 타인을 대하는 온유한 태도, 욕망을 다스리는 절제의 모습으로 일상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4. 십자가에 욕망을 못 박는 거룩한 결단

그렇다면 우리는 이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비장한 선언을 일상의 아주 작은 실천으로 번역해 줍니다. 거창한 종교적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긴장 속에서 먼저 사과하는 용기, 유혹의 경로를 사전에 차단하는 지혜, 은밀한 죄를 빛 가운데 드러내는 정직함입니다. 이는 마치 카라바조의 그림 속 마태오가 세관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결단과도 같습니다. 핑계 대신 회개를, 방종 대신 절제를 선택하는 그 순간순간이 모여 거룩이라는 거대한 성화를 완성해 갑니다.

은혜는 결코 방종의 면허증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죄와 싸울 힘을 공급합니다. 오늘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습관처럼 굳어진 육체의 소욕입니까, 아니면 맑고 거룩한 성령의 소원입니까? 장재형 목사의 권면처럼, 지금 이 순간 십자가 앞에서 나를 부인하고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화는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걷는 동행입니다. 육체의 일을 벗어버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유, 그 거룩한 빛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내디디시기를 소망합니다.

www.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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